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정확하게 2010년부터 2022년까지 횟수로 13년 동안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가짐과 생각이 얼마큼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게 해 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 증상이 발생하는 이유와 극복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자세하게 남겨보려고 합니다.
회사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보상심리에 대해 마음으로는 '이건 아닌데'라고 느끼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증을 동반했기에 정말 긴 터널을 지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보상심리, 우울증, 번아웃 등등 용어에 대해선 모두 아실 것으로 생각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20~30대의 13년이라는 긴 기간의 인생을 소설 형식으로 길게 적을 것이니 책 읽는다 생각하고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긴 글 몇 편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 마음 한 편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국발 리먼 브라더스 파산에 따른 금융위기가 닥쳐왔던 2008년 나는 복학생이자 대학교 3학년이었다. 군대를 가지 않은 동기들은 취업을 준비 중이었는데 경제가 어려워 취업이 안 됐다는 동기들 얘기가 하나 둘 귀에 들어왔다. 사실 금융위기라고 뉴스에서 난리가 났지만 부모님께 따박따박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었기에 뭐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체감되지 않았었다. 그냥 취업이 좀 힘들어지겠구나 정도? 지금이야 위기에는 현금을 들고 있다가 주식이 박살 나면 투자해야지, 부동산이 폭락하면 저렴하게 구입해야지 같은 생각이라도 나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먹자 대학생이었으니 오직 목표는 "취업"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는 시험 볼 때만 했으며 밴드부의 일원으로 수업이 끝나면 용돈으로 동기들과 술 한잔 마시며 취업과 음악, 여자친구에 대해 얘기하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복무를 마치고 바로 복학한 친구들은 한창 취업 준비 중이었다. 바로 합격한 동기들도 있었지만 몇 번이나 떨어져서 의기소침해 있던 동기들도 많았다. 보통 취업 과정을 보면 서류합격후 인적성 검사, 1차, 2차 면접, 최종 합격 순으로 이어지는데 대부분이 서류전형에서 탈락이 많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어떤 기업은 스카이 빼고는 뽑지 않는다더라, 어떤 기업은 우리 대학교에 몇 명 정도 붙여주더라 같은 카더라 통신이 많았을 때였고 특정 기업에서 같은 대학교를 나온 동기들이 탈락했다면 나도 탈락할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위기감을 느끼거나 취업을 더 준비하거나 하는 행동이 있어야 했을 것 같은데... 그것도 탈락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무조건 취업될 거야'라는 근자감은 어디서 나왔던 것인지... 솔직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성적이 얼마큼 되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3점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보통 군대 가기 전 1~2점대였던 게 군대 제대 후 3점대 중 후반으로 올라가려면 4점대를 받아도 모자 랄 판인데 3점 중반의 점수는 내 노력만큼의 결과였다.
그렇게 2008년이 지나고 대학교 4학년인 2009년이 왔다. 이제서야 취업을 하려면 자소서가 필요하고 토익점수가 필요하고 또 삼성에서는 토익스피킹이나 오픽점수가 필요하다는 얘기에 부랴부랴 시험을 봤다. 처음 친 토익에서 680점이라는 점수가 나왔다.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은 한 번에 900점대가 나왔다는 얘기도 들리고 매일 나와 붙어 다니던 동기는 뽀록으로 800점이 나왔다고도 했다. 나는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왜 뽀록이 터지지 않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시험준비는 토익은 한 두 달 정도 공부를 했고 오픽은 1주일 정도? 자소서는 아직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토익을 총 3번 보니 취업전 최종으로 755점, 토익스피킹은 IL이란 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당시에도 상당히 낮은 수준의 점수였고 입사지원자격에 토익 700점 이상만 서류지원가능이라는 문구가 있었기에 서류 전형을 위한 턱걸이 점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토익점수는 정말 영어를 잘하는지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신입사원의 자격을 검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래도 취업준비 한답시고 도서관에 꾸준히 출석체크는 했고 노트북이 없던 나는 도서관 내 멀티미디어실의 컴퓨터를 이용해 자소서를 작성했다. 어떤 곳은 항목별 500자, 어떤 곳은 한 항목에 2,000자. 다양한 형식이지만 대부분 작성항목은 비슷비슷했기에 나의 장단점, 성과를 낸 경험 등을 바탕으로 5가지 정도로 작성하였다.
자소서 작성은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일 하나하나가 성과인 회사에서도 공적조서를 작성 할 때에도 성과를 어떻게 포장해서 작성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지는데 그때는 그냥 시간이 지나갔기에 나이가 들었고 공부를 하라기에 공부를 했던 느낌이었다. 내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았던 게 있었나? 내가 성과를 낸 것이 있었나? 자소서의 모든 항목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것 같이 나에게 거짓말을 독촉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기억을 살려 고등학교 때 봉사했던 일, 반장선거에서 당선된 일, 밴드부의 일원으로 공연을 진행한 일, 남자라면 빠지지 않는 군대에서 어려움을 극복했던 일 등을 열심히 부풀려서 작성했다. 그리고 채용공고에 맞춰 수정하고 토익점수와 함께 내 전공의 모든 기업에 입사지원했다. 내 분야는 토목이었기에 건설회사의 채용에 대해서는 모두 지원했던 것 같다.
2009년 5월부터 상반기 채용공고와 함께 지원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지원할 당시에는 서류는 무조건 붙고 면접에서 당락이 결정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지만 왜 그랬을까?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한마디로 나는 내가 골라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너희 기업에서 일해줄게'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 느낌은 오래가진 않았다. 지원하고 몇 주가 지나자 서류전형 합격자 공지가 나왔는데 당연한 결과지만 모든 지원에서 서류전형 탈락했다. 어떻게 단 1개의 회사에서도 나를 뽑지 않았을까? 지금 되돌아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데, 그때는 그냥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노력도 거이 하지 않았고 스펙은 졸업장과 운전면허증이었는데 (물론 기사자격증은 취득했지만 말이다.)도 나를 뽑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여름방학 내내 뭘 했는지도 모르겠다. 계절학기를 들었고 취업준비를 한다고 시간이 지난것 같다. 지금의 와이프인 여자친구가 있었다. 취업준비.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자소서 다듬기라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용이 들더라도 자소서 첨삭을 해줄 전문가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혼자서 작성하고 수정하고 전문가 또는 같이 취업을 준비하는 동기들의 도움은 받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동기들은 스터디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의 것도 참고해서 수정한다는데... 혼자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편해서 그랬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거짓말 투성이인 내 자소서가 타인에게 보이는 게 싫어서였을 것이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느낌, 너무 애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싫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대망의 2009년 2학기 개학이다. 이번에 취업을 하지 못하면 나는 취업 재수생이 된다. 마치 게임같은 압박감속에서 할 수 있다는 마음과 또 탈락하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교차했다. 여름방학을 거치면서 스펙이 변한 것은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이 오래가지 않았고 그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특정기업의 서류 탈락이었다. 그 특정기업은 바로 현대건설이었다.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현대! 토목, 건축을 전공한 대학생들 중 시공사를 지원하는 대부분은 현대를 가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요즘엔 삼성물산이 더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전통의 현대건설을 더 쳐주는 분위기였다. 각설하고 자신감이 확 떨어졌던 이유는 그 당시 현대건설에 지원한 인근의 동기들 중 탈락한 사람이 바로 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소위 '쟤보다는 내가 낫다'라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서류는 모두 붙었는데... 나는 떨어졌다. 나는 현대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며 애써 자기 위로를 했지만 사실 멘털은 저 멀리 외출해 있었다.
그날 밤. 생전 취업얘기를 하지 않던 내가 저녁에 부모님께 이런 사실을 얘기했다.
"아빠. 나 올해 취업이 안 될 수도 있을것 같아요"
"그래? 뭐 때문에 그러니? 무슨 일 있니?"
"그게... 저번에 현대건설에 입사지원을 했는데... 동기들 중에 나만 떨어졌어요."
"아쉽게 됐구나, 다른 합격한 곳은 있니?"
"아직요..."
아들의 이런 얘기를 들은 부모님의 기분은 어땠을까? 취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믿음에 대한 배신도 있었을 테고, 기대가 너무 컸을까 하는 실망도 있었을 테고, 우리가 너무 지원을 못해줬나 하는 자책감도 있었을 터였다.
사실 내가 대학원이나 다른 진로를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취업. 그것도 공기업이나 공무원을 제외한 건설회사만 생각했던것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였다. 여느 가족과 같이 우리 가족도 아빠와 나의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었다. 노자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항상 내게 좋은 구절을 알려주시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아빠가 뜬구름 잡는 원리원칙만 따진다며 비난했고 결국 대화로 이어진 적이 많이 없었다. 이런 게 반복되기도 했고 내 성향이 남이 나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많이 느끼기에 나를 통제하는 부모님을 떠나 하루빨리 지방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본론으로 들어와서 나만 떨어졌다는 생각에 지치고 있던 어느 날! 나에게도 한줄기 빛이 비치었다. 인터넷으로 서류전형 합격 여부를 조회하던 차에 "000님은 00 건설 서류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라는 페이지를 본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는지 모르겠다.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무조건 여기에 합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든 일정은 나를 서류 합격시켜 준 이 기업에 맞춰야 했다. 마침 대학교의 인터넷 카페에 00 건설 합격자 스터디 모임이란 공지가 올라왔고 바로 댓글을 달아 참여할 수 있었다. 한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을까? 00 건설은 서류 합격 후 자체 인적성검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서류전형 후 대부분이 여기서 떨어지는데 이 단계만 넘어가면 면접이기에 무조건 합격해야만 했다. 인적성은 뭘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큐 테스트 같은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기업에 따라 문제집에 있었고 전공과는 다르게 상식, 국어, 도형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나왔다. 필사적으로 합격해야 했기에 문제집을 구매해서 시간을 측정하며 공부를 했다.
이런 노력을 하늘이 알아줘서였을까 인적성 전형에 합격했다. 계속 탈락만 해서 시험을 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이제 면접이라니 감개무량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사실 서류와 인적성 전형은 좀 막막했지만 면접은 정말이지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얘기하고 말을 듣는 게 큰 부담이 아니었고(아버지 제외) 나를 반듯하고 착실한 이미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기에 첫인상이 중요한 면접은 자신이 있었다. 면접은 1차, 2차로 나뉘었는데 1차 때는 자료 분석 + 다대일 압박면접이고 2차는 임원단 면접이었다.
드디어 1차 면접날이다. 전날까지 1분 자기소개는 미친 듯이 외웠기에 입에서 술술 나왔다. 또 이제까지 00 건설회사의 면접 족보를 구해서 하나하나 작성해 보며 외웠기 때문에 정말 이상한 질문만 아니면 대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1차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그냥 가기가 뭐해서 사무실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들러 잘하고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면접장으로 출발했다.
면접장에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험생들끼리의 신경전 때문인지 정말 조용했다. 간혹 다른 면접에서 만난 사람인지 서로 아는 척을 하고 저번에 어땠는지에 대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 없기에 전날 준비한 자기소개와 족보 등 프린터 해간 자료를 읽으며 마음을 잡고 있었다. 드디어 1차 면접을 위한 문제 분석에 들어갔다. a4용지에 문제가 적혀있고 이에 대해 어느 쪽이 더 이익인지 회사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전지에 작성하는 것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던 회사의 중역분들께서도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핏덩이가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기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면접에서는 최대한 기업의 역사와 방향을 꿰뚫고 있어야 하기에 자료 분석을 통해 회사의 발전 방향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진 압박면접!. 면접관 3분과 나 혼자 앉아있는 공간. 두꺼운 문을 열고 푹신한 카펫을 구두로 밟으며 들어간 적당한 크기의 방! 너무 긴장한 상태여서 그랬을까 그날의 냄새, 공기, 분위기가 모두 기억이 난다.
들어가서 앉아마자 면접관중 한분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면접을 오기 전 아버지께 들렸을 때 면접 잘 보라며 말씀해 주신 걸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평소 아빠는 너무 고지식하다고 평가하며 대화도 잘 나누지 않았는데... 이런 걸 물어보시다니... 순간적으로 희열, 후회 등등 오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지원자분, 면접 오기 전에 뭐하고 왔어요?"
"네 오기전에 아버지 사무실에 들러서 오늘 면접 본다고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아버지랑 어떤 얘기했나요?"
"아... 그게 아버지가 평소에 노자를 좋아하시는데요. 한 구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 어떤 구절인지 알려줄 수 있나요?"
"네 소년기엔 정직하고, 청년기엔 겸손하고, 장년기엔 공정하고, 노년기엔 신중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정확히 노자의 구절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면접을 보러 간다고 하니 항상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저렇게 말씀해 주셨고 난 그대로 얘기했다. 그런데 이때 면접관들이 날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후 약 1시간 동안 어떤 질문이 왔는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왠지 붙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2차 면접까지 마치고 결국 이 기업에 합격했다. 서류를 통과한 게 이 기업 하나뿐이었는데, 최종까지 합격했다. 말도 안 됐지만 그때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별로 노력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합격을 했다니 밑을 수가 없었고 해냈다는 기분에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4학년 2학기 중에 합격했기에 학점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취업이 어려운 나머지 취업을 했다는 증명서를 내면 시험을 안 봐도 A+를 준다는 교양 교수님도 계셨다. 참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렇게 끝났다. 너무나 짧고도 짧은 취업준비 기간을 끝으로 나의 대학생활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