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4. 1. 16. 10:31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2 - 회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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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편 "취업준비"편을 먼저 보고 오시면 더 읽기 좋으실 겁니다.
 
2024.01.15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정확하게 2010년부터 2022년까지 횟수로 13년 동안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가짐과 생각이 얼마큼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게 해 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 증상이 발생하

universe.dadasis.com

 
눈이 펑펑 오던 - 10년 만의 폭설이 왔던 - 2010년 1월 4일 아침 그룹 연수를 위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눈은 말도 못 하게 많이 왔지만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캐리어를 끌고 구두를 신고 집 앞 언덕을 내려올 때의 기분이란 설렘 반 긴장 반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나의 인생에도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는 무엇인가 거대한 운명의 시작을 느꼈는지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지기도 벅차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룹연수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시작해서 전국의 큰 규모의 그룹 사업장을 견학하고 강의를 듣는 일정으로 2주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솔직히 그때까지의 나는 호텔의 하루 숙박요금이 얼만지도 몰랐고 강남은 술 마실 때만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런 곳에 얼마 큼의 직장이 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
 
하루하루가 천국이었다. 여유로운 일정, 호텔 숙박, 저녁엔 회식.
'이래서 대기업에 입사하는구나, 이런 기업이라면 평생 충성할 거야'
진심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한두 명은 더 상위의 기업에 붙어서 이탈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전국의 공사현장, 공장, 인재원 등을 돌며 VIP가 된 양 높은 분들의 브리핑을 듣고 사업장에서 대접하는 맛있는 밥을 먹었다. 조가 정해지고 조별 활동과 과제도 했는데 모든 조원들이 우수했고 스마트했다. 걔 중에는 발표를 정말 잘하는 사람도 있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는 동기도 있었다. 어떤 동기는 미국의 큰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입사를 했다고 했다. 다들 능력이 출중한데 나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입사의 기쁨에 취해 있어서 그랬는지 회사에서 나를 대우해 주는 게 좋았는지 그 상황이 마냥 좋았다.
 
2주의 연수가 끝나고 그룹 동기들은 각 사별로 흩어졌다. 사 별로 본사의 위치도 다르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동기, 00에 가는 동기, 00으로 가는 동기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건설에 입사했기 때문에 일단 건설본사에서 한 달간 교육을 받고 현장에 배치되었다. 건설사 본사에서는 그룹 연수보다 더 구체적인 건설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건설회사 회계규정과 산업구조 등에 대해 강의를 들었고 현장 소장님들께서 직접 방문해서 신입사원들에게 현장에 대해 알려주는 식이었다. 교육은 오전 9시에서 6시까지 진행됐고 이후에는 퇴근 후 같은 전공끼리 모여 술 한잔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상은 했지만 토목 동기들은 주량자체가 달랐다. 대학교 때도 못 마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여기도 엄청났다. 소주도 2병은 기본이었던 것 같고 술을 잘 마신다는 게 엄청난 능력이나 덕목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막 졸업한 대학생이지만 대기업 회사원으로 연봉이 4,000만 원에 육박했으니 돈도 많아서 그런지 이때부터 씀씀이가 커졌던 것 같다. 술집에 들어가도 먹고 싶은 것들을 많이 시키고 내 인생의 마지막 여유로운 시기였으리라.
 
이상하게 눈이 많이 왔던 2010년 3월의 어느 날, 3월 적설량으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많이 왔다고 했는데 그날 처음 현장에 배치된 날이었다. 이날도 그룹연수를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슈트+넥타이 차림에 구두를 신고 캐리어를 끌고 갔다. 서울에서 서둘러 KTX를 타고 00역에 갔다. 거기서 다시 지하철을 탔다. 처음 탔던 00의 지하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울보다 크기가 작아서 타자마자 '이거 뭐야'하며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지하철에서 내려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아직 현장 사무실이 마련되지 않아서 아파트를 월세로 얻어 업무를 보고 있었던 현장이었다. 그곳은 00에 있던 xx공사 현장이었다.  1편에서 말한 데로 내가 그곳에 배치된 주된 이유는 회사에서 선호 현장을 조사하는 시간에 집에서 떨어져 자유를 얻기 위해 일부터 그곳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모두 서울에 가까운 현장을 원했는데 나는 무조건 지방을 외쳤다. 그때는 나의 한 선택이 이렇게 큰 도화선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2주 동안의 멋졌던 대기업 신입사원의 생활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파트에 들어가자 84인지 59인지 가정집 아파트에 컴퓨터가 3~4대, 복합기 프린터, 대형 도면 인쇄를 위한 플로터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사람은 현장소장, 부장, 차장, 과장, 대리, 사원까지 총 10명은 있었다. 북적북적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런 곳도 있구나'라고도 생각했지만 머릿속에 압도적으로 많이 든 생각은 '여기 군대다...'였다. 첫날은 군대에서 자대배치를 처음 받은 이등병처럼 각을 잡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부장이라는 사람이 옆에 앉아서 가족관계나 고향 등등 이것저것을 물었고 여기 다 좋은 사람들이라며 잘 지내보자고 한 명 한 명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리고는 나와 같이 배치받은 동기 형을 앉히더니 나는 공무부, 동기 형은 공사부로 가라고 단번에 부서를 결정해 주었다. 그 이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뭘 먹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가자마자 했던 일은 이삿짐 싸기였다. 이유는 우리가 간 다음날이 현장 사무실이 완공되어 그쪽으로 짐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첫날 밤, 잠은 그 아파트에서 열댓 명이 각 방에 흩어져 잤다. 소파에서 자는 사람. 방에 이불을 펴고 자는 사람... 같이 배치된 형과 이불을 펴고 방바닥에서 똑바로 누운 상태로 - 소위 각을 잡고 -잠이 들었다.
'새로운 시작인데 몇 달 전과는 많이 다르네...'
 
다음날 오전 6시 정도 되었나 알람이 울리고 모두가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했다. 동기 형과 나는 서로 눈을 맞추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단체 생활 시작이구나.'
'근대 정말 군대랑 똑같네'
그렇다. 보통 공사가 오전 7시부터 시작되니 우리도 6시에는 일어나야 그 일정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비록 본격적인 업체선정과 공사가 투입되진 않았어도 나중을 대비해서 미리 습관을 잡아 놓자는 현장소장님의 배려였던 것이었다. 새로운 아침에 적응하기도 전에 우리는 아침을 먹고 바로 이사집을 쌌다. 컴퓨터는 업체가 와서 옮겨준다고 했고 우리는 책상 등 가구와 집기류 들만 옮기면 됐다. 
'아 현장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면 되는구나'
'정말 모든 일...'
책상을 트럭에 싣고 간 곳은 산 넘고 물 넘어서 있던 공기 좋은 곳이었다. 근처에는 동네 슈퍼 하나 있는 아주 조그만 마을이었고 차가 없으면 이 현장에서 걸어서 지하철을 타러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 그 위치가 어디인지 옆에 어떤 도로가 있었는지 산책로는 어땠는지 정확한 주소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지만 자세한 지명은 적지 않으려 한다. 이유는 다른 분들의 소중한 경험이자 인생을 나의 글 하나로 멋대로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고, 그 시기의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생각과 결과가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플리스 같은 피복을 받고 준비해 간 면바지와 셔츠 위에 입으니 영락없지 나도 그 일원이었다. 소속감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룹 연수 때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어쨌든 그룹과 건설사의 일원이자 앞 날이 창창한 신입사원이었다.


 
본격적인 회사생활은 다음 편에서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13년간의 일을 지금 기억해서 쓰려니 만만치 않네요. 그래도 신기하게도 하나하나 기억이 다 납니다. 누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기의 나를 기억하고 위로하며 어루만저주기 위해 글을 계속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마 위와 같은 글 10편 이상 나올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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