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5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정확하게 2010년부터 2022년까지 횟수로 13년 동안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가짐과 생각이 얼마큼 중요한지 뼈저리게 알게 해 준 보상심리에 대하여 이 증상이 발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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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6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2 - 회사생활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2 - 회사생활
2편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편 "취업준비"편을 먼저 보고 오시면 더 읽기 좋으실 겁니다. 2024.01.15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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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6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3 - 회사생활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3 - 회사생활
2024.01.15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정확하게 2010년부터 2022년까지 횟수로 13년 동안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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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7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4 - 회사생활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4 - 회사생활
2024.01.15 - [분류 전체보기] -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우울증 보상심리 극복 소설 1 - 취업준비 정확하게 2010년부터 2022년까지 횟수로 13년 동안 겪었으며, 결과적으로 "나"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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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생각을 하고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해보는 거야라며 신나게 현장에 내려갔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고 바뀐 것은 감동받은 내 마음뿐이었다. 다시금 불만이 올라왔고 머릿속엔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하루에 만 번은 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이 현실에 반영되어서 였을까. 평소 같으면 가벼운 여자친구와의 다툼이었는데 모든 게 귀찮고 싫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여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그 친구는 왜 그러냐며 집 앞으로 온다고 했고 제발 만나달라며 애원을 했지만 내 마음은 냉정해져 있었다. 내 마음이 나를 살리기 위해 그랬는지 평소같이 싸우고 화해하고 대화하는 과정도 없이 그냥 말 한마디로 헤어져버렸다. 그 뒤로 연락도 몇 번 오고 했지만 모두 읽씹해 버렸다. 나도 내가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정도로 가족과 영화의 대사에서 눈물을 흘렸던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상황에선 전혀 감정기복이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 술도 더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워낙 자주 있던 회식이었고, 아니 저녁마다 술을 마셨으니(1주일에 3~4번) 회식이 아니라 그냥 저녁이었다. 메뉴도 다양했는데 순대전골이나 닭갈비, 조개찜, 삼겹살 등등 거이 모든 메뉴를 섭렵했고 신기했던 것은 모든 현장의 회식비는 대부분 현장비용으로 처리되었다. 워낙 공사금액이 크기에 회사에서도 이런 회식비용의 포지션이 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이렇게 먹어도 설계변경 한 번이면 모두 만회할 수 있다는 개념이 있었다. 치킨에 맥주는 현장숙소에선 일상이었다. 소주로 한 병 반정도 먹던 나도 자주 먹다 보니 두 병을 마시게 되고 매일같이 안주를 들이켜다 보니 66kg이던 몸무게는 78kg까지 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1년이 지났다. 현장에 온지 벌써 1년이 지났다. 27살이던 나는 28살이 되었다.
'28살이면 아직 취업은 가능한데...'
'어떻게든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겨우 하나 붙어서 왔는데 이 짓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결국 다시 제자리 였다. 아무리 나가고 싶어도 다시 재 취업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부모님 반대는 핑계였다. 그냥 나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그 부족함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바꾸려면 행동을 해야 하는데 행동이 없으니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생각만 점점 더 복잡한 미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년이 지나다보니 새로운 신입사원이 현장에 왔다. 한 명은 동생이었고 한 명은 나보다 2살이나 많았다. 어떻게 지내야 하나... 후임인데 말은 놔야 하나 형이라고 존칭을 써야 하나. 그러다가 흐지부지 반은 존대 반은 반말로 지내게 되었다. 아마 그분도 동생이 선임으로 있어서, 그것도 불만에 가득한 까탈스러운 동생이었으니 얼마나 불편했을지 모르겠다. 참 못났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웃픈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자동차를 가지고 다녔다. 아빠차였는데 아빠가 운전하는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거이 세워놓다시피 한 차였다. 뽑은 지 5년이 됐는데 그때까지 1만?을 못 탔을 것이다. 현장에 다녀보니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다니기 힘들었고 워낙 시골이라 차가 없으면 기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 종점에서 현장에 있는 과장님께 매번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반떼 XD 풀옵션. 그 당시에는 나온 지 5년 정도밖에 되질 않았기에 타고 다니기 꽤 괜찮았다.
신입직원 중에 한 명은 집이 서울이었다. 건대입구 역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월요일 새벽에 내려올 때도 차편이 애매하니 같이 가자며 선심 쓰듯 제안했다. 문제는 차에 있던 약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일어났다.
"입사한 거 축하해. 올해가 작년보다 더 어렵다던데 정말 대단하다."
"감사합니다. 기사님도 취업하기 힘드셨죠?"
"어떻게 뽀록으로 된 거지 뭐."
"저도 사실 뽀록이에요. 하하. 스펙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됐네요."
"뭐 취업 하기만 하면 된 거지 머. 회사 두 개 다닐 것도 아닌데."
"그렇죠. 하하"
"저 기사님 여기 현장분위기는 어때요?"
아마 이 질문이 시작이었던것 같다. 모범적인 답변은 "여기는 가족 같고 모두 잘해줘 현장에서 지내야 하는 게 좀 단점인데 그래도 분위기가 좋아서 괜찮아."일 텐데 이때 나의 마음은 이것과는 한참 동 떨어져 있었다.
"사실 나 조만간 여기 때려칠꺼야."
"아니.. 기사님 왜요??"
"000 기사도 며칠 있어보면 알아. 특히 공사팀 000 팀장 있지? 겉으로는 사람 좋게 보이는데 겪어보면 알게 될 거야. 정말 000이야. 00 건설은 시스템도 x 같고, 아니 아얘 시스템이 없어. 그냥 쌍팔년도 주먹구구 그 자체라니까. 이런 데서 있기에는 내가 아까워."
"아... 그 정도예요? 이 회사 밖에선 이미지 엄청 좋잖아요. 정말 그 정도예요.?
"내가 볼 땐 그래. 나보고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월 1,000만 원을 준다 해도 이 짓 안 해. 그리고 월 200만 주면 그냥 때려치우고 다른 데 갈 거야."
"현장적응 어렵다고 그러던데 정말인가 봐요."
"이건 어려운 게 아니야. 그냥 xx 같은 거야."
이런 말을 계속 해댔으니 신입사원의 기분은 어땠을까? 나중에 술자리에서 얘기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상에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나를 반면교사로 삼았을지 내 감정에 동화되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영향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차라리 용기를 내서 조직에서 빨리 나오는 것이 나와 기업을 위해서도 좋은 결정이었을 텐데 왜 그리 재취업이 어렵게 느껴졌는지, 엄청난 불만과 몸에 이상증세까지 나타나는 상황에서 왜 버티길 고집했는지는 차 후에 생각하게 되었지만 차라리 그때 그냥 그만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현장에 일이 생겨서 파견을 잠깐 나갔던 동기형이 돌아오자마자 퇴사를 한다고 했다. 사실 다른 현장의 파견도 공사팀에서 잘 버티지 못하니 일단 파견으로 보내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군대도 똑같다. 다른 부서에서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정작 에이스는 보호하고 소원수리를 자주 쓰는 병사나 느리거나 말길을 잘 못 알아듣는 병사부터 보내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 형의 능력은 충분했으나, 아니 오히려 넘쳤으나 그 팀장 밑에서 힘들어했단 이유, 그것도 아무 근거 없이 먼저 공사팀으로 발령이 났다는 이유로 파견을 간 것이다. 그리고 돌아와서 퇴사를 한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1년을 같은 방에서 동고동락한 그 형을 붙잡지 못했다. 조금만 버티자고 그러면 좋아질 것이라고 어렵게 들어왔는데 조금만 버티자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입에서 나온 얘기는 '축하해 형, 나도 곧 따라갈게'였다. 그래도 동기라고 마음속으로 엄청 의지하고 있었는지 그 형이 퇴사하고 나자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는 '나는 언제 퇴사하지? 나도 급한데...'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회사생활을 이 이후로 4년 정도를 더 했던데는 나름 나를 이해해 주고 잘 대해주던 공무팀 식구들이 있었다. 당시 공무팀장을 제외하고 과장님 한 분과 대리님 2 분이었는데 과장님과 대리님 각 1분씩은 나와 10살 차이가 났고 대리님 한분은 5살 차이였다. 처음에 공무팀에 갔을 때도 항상 친절히 대해 주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자세하게 알려주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감사한 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5년을 그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업무시간에는 각자 일이 있으니 얘기하는 게 힘들지만 일과가 끝나면 현장사무실 앞 주차장에서 족구도하고 가끔 근처 낮은 산에 올라도 가고 나가서 술 한잔 할 때는 나를 불러서 꼭 같이 갔다. 그럴 때면 '내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좀 더 힘내자.' '이 현장만 버티는 거야!'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마구 났다.